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에서 발간하는 강론길잡이 선포와 봉사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5. 12. 13 대림 제3주일-다해 제2독서

 

필리피 4,4-7(권고)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기쁨의 원천>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4,4).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마음에 품고(1,7)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몹시 그리워하고(1,8) 있는 사랑하는 필리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격려합니다. 참 기쁨을 누리는 이들만이 다른 이에게 기뻐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기뻐하라고 형제와 같은 필리피 교우들을 다독이는 바오로 사도가 이미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필리피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에 바오로가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혀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1,13)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1,19-23) 사실 앞에서, 어떻게 이 극한의 상황에서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는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인이 된 바오로, 한치 앞의 생사가 불분명한 바오로는 과연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힘차게 솟구치는 기쁨을 얻게 되었을까요? 이미 극도의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아야만 할 바오로가 무엇에 힘입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4,6)라고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어떻게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기에, 이 평화가 형제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4,7)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3,1).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4,4).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반복되고 있는 바오로의 기쁨에의 초대는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의 바람이며 기원으로서, 명확한 신학적 배경에 바탕을 둔 일종의 명령입니다. 바오로에게 기뻐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의 가까이 다가오심그분과의 만남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중적 의미로 다가오십니다. 우선 종말론적 다가오심에 대한 것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과 관련하여 현재의 삶을 상대화합니다. 이러한 전망에서는 기쁨이 희망 안에서 굳건해지는데 거의 희망과 동의어가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기쁨은 즉시 다가오심, 곧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그리스도와의 공존입니다(새로운 성경신학사전, 바오로딸).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그리스도와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사도 9). 바오로는 필리피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3,5-9).

 

어느 날 불현 듯 자신에게 다가온 주님을 만난 바오로는 이제 자신이 지녔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길 만큼 그리스도와 함께 함을 기쁨의 원천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3,18)로 살아가는 이들,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3,19)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벗들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이들이 누리는 악취 나는 기쁨,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써 탐욕의 배를 채우는 찰나의 기쁨, 불의와 거짓을 마다하지 않고 쥐어 잡은 더러운 권력이 주는 헛된 기쁨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이 기쁨은 시기심과 경쟁심이 아니라 선의와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복음을 수호하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1,15-16). 이 기쁨은 죽든지 살든지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1,20).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1,29). 이 기쁨은 이기심이나 허영심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이들(2,3), 자기 것만 돌보지 않고 남의 것도 돌보는 이들(2,4),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한 이들(2,5)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곧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이미 시작되어 영원히 이어질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오로는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에서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2,6-11). 탐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고 나누는 비움의 삶, 다른 이들에게 군림하기 위해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섬기기 위한 낮춤의 삶, 하느님께 반항하는 것이 아닌 절대적 순종의 삶, 제 살기 위해 벗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벗을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죽는 삶을 살아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만이 바오로 사도가 고난과 시련 가운데에서 맘껏 누릴 수 있었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 기쁨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합니다.